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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수선화에게 외

 

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 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그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박노해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산

가장 높고 깊은 곳에 사는

께로족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희박한 공기는 열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고

발길에 떨어지는 돌들이 아찔한 벼랑을 구르며

태초의 정적을 깨트리는 칠흑같은 밤의 고원

 

어둠이 이토록 무겁고 두텁고 무서운 것이었던가

추위와 탈진으로 주저앉아 죽음의 공포가 엄습할때

 

신기루인가

멀리 만년설 봉우리 사이로

희미한 불빛 하나

 

산 것이다

 

어둠속에 길을 잃은 우리를 부르는

께로족 청년의 호롱불 하나

 

이렇게 어둠이 크고 깊은 설산의 밤일지라도

빛은 저 작고 희미한 등불 하나로 충분했다

 

지금 세계가 칠흑처럼 어둡고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있다면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을 것이다

 

세계속에는 어둠이 이해할 수 없는

빛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있다

거대한 악이 이해할 수 없는 선이

야만이 이애할 수 없는 인간정신이

패배와 절망이 이해할 수 없는 희망이

깜빡이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있다

 

그토록 강력하고 집요한 악의 정신이 지배해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희미한 등불로 서 있는 사람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무력할지라도 끝끝내 꺾여지지 않는 최후의 사람

 

최후의 한 사람은 최초의 한사람이기에

희망은 단 한사람이면 충분한것이다

 

세계의 모든 어둠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이 살아있다면

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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